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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ities/Wissen

한국의 시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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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명 중 29명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삼창을 하고 일경의 손에 순순히 체포되었다. 2시 30분, 파고다공원에 모여있던 수천 명의 학생들은 민족 대표들과는 별도로 독립선언서를 다시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준비했던 채극기를 꺼내 흔들었다. 곧 전국에서 미리 상경하여 대기하고 있던 민중들이 가담하면서 시위군중은 급속히 불어났다.

 같은 날 평양, 의주, 안주, 진남포 등 6개처에서도 동시에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다음날 함흥, 개성 등 이북지역에서부터 21일 제주 조천리에 이르기까지 전국 13개도가 일제히 만세운동의 대열에 동참했다. 상인들은 연합하여 철시를 단행함으로써 일제헤 항거의 뜻을 보여주었고, 노동자의 농민, 승려, 어린이, 거지, 기생들에 이르기까지 조선민중 모두가 위험을 무릅쓰고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3월 1일 이후 3개월간 전국 202만 3,089명이 참가하여, 총 7,509명이 사망하고 1만 5,961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되었다. 민족대표들에 의해 발의되긴 했지만, 시종일관 지도부 없이 모든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3·1운동은 국내 최초의 근대적 시민혁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4·19 혁명
 
1960년 3월 15일, 대한민국 제4대 정·부통령선거에서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저지르자 경남 마산의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이승만 이기붕의 당선무효를 외치며 '협잡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였다. 진압경찰 외에도 곤봉으로 무장한 괴한들이 백색테러를 자행하여 시위학생 다수가 다쳤으며, 마산상고생 김주열군이 시위도중 행방불명되었다.

 4월11일, 행방불명되었던 김주열 군이 안면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낚시꾼에 의해 해한에서 발견되었다. 분노한 마산의 학생과 시민들이 '학생경관 처단' '재선거'등을 외치며 거리로 뛰쳐 나왔다.

 4월 19일, 서울에서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자 오후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경비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오후 4시에는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4개 도시로 계엄령이 확대되었다. 오후 5시, 경비계엄이 비상계엄으로 바뀌며 경무대 앞에서 발포가 시작되었다. 이날의 무력진압으로 총 183명의 사상자와 6,25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4월 25일,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300여 명이 계엄 하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4·19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가행진을 단행했다.

 4월 26일 오전 10시,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직 사임 및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의 12년 치세는 종언을 고하고 의원내각제를 핵심으로 하는 제2공화국이 시작되었다.





6·3 한일회담 반대시위

 1964년 3월 24일, 서울대·연세대·고려대 학생 3,500여 명이 '제국 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화형식'을 한 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25일에는 지방에서 약 5,000명, 서울에서는 4만 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26~27일에도 전국에서 약 6만여 명이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벌였다. 이는 4·19 이후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 치하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대규모 시위였다.

 4월 19일, 박정희 정부가 한일 국교정상화를 전제로 한 한일회담을 계속 추친하자, '4·19정신의 계승'을 외치며 다시 전국적인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5월 20일, 서울에서 학생 2,000명과 시민 1,000명이 집회를 열고 기존의 '한일회담 반대'라는 이슈에 더해 '5월 군사정권은 5·16 이후의 부정, 부패, 독선, 무능, 경제난, 민족분열정책과 굴욕적 한일회담 등의 역사적 범죄를 자인하고 국민의 심판을 받으라'는 결의를 채택하고 본격적인 '반정부시위'에 돌입했다. 이날 서울 시내 32개 대학이 참가하는 '한일굴욕외교반대학생총연합회'가 결성되었다.

 6월 3일, 1만여 명의 학색와 시민이 '굴욕외교, 구걸외교 결사반대'를 외치며 서울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오후 8시, 박정희 정부는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병력을 투입하여 시위대를 강견진압했다. 이후 일체의옥내외 집회·시위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 통행금지시간 영장 등 일련의 폭압적 조처가 취해졌다.

 1965년 6월 22일, 이동원 외무자오간과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이 도쿄 일본총리 관저에서 '한일협정' 문서에 서명했다. 그날도 한국은 위수령 및 계엄령 상태였다. 이로써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필요와 식민지 피해청산을 차관으로 무마하겠다는 일본측의 요구가 공히 충족되었다. 한일협정의 결과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 1억 달러의 차관을 받게 되었으며, 한국은 향후 일본에 대한 일체의 식민지피해 청구권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른바 '사과와 배상 없는 국교정상화'가 성사된 것이다.





6·10 민주항쟁

1987년 6월 9일, '6.10 대회 출정 연세인 결의대회'에서 시위에 참가한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다. 1987년 6월 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같은 날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미 전두환 군사정권은 기존의 간접선거제를 유지한다는 '4·13호헌조치'를 발표한 상태였다.

 이후 6월 15일까지 명동성단 농선투쟁, 18일 최루탄 추방대회, 26일 민주헌법대행진에 이르기까지 전국 학생·시민 500만 명은 '4·13호헌 철폐' '직선제개헌 쟁취' '군사독재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격렬하고 끈질긴 거리집회 및 시위를 벌였다. 특히 26일 시위에는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읍 지역에서 100만여 명이 참가, 6월항쟁 중 최대규모를 기록했다.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통령후보 노태우는 '직선재 개헌' '평화적 정부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선언'을 발표했다. 이로써 박정희의 18년 독재이후 12·12군사반란으로 집권하여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민중들의 민주화 요구를 탄압하고 또다시 '지명선거'로 군부독재체제를 연장하려 했던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시대는 종식되었다.

 7월 5일 오전 0시 10분, 경찰의 직격탄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던 연세대생 이한열이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에서 사망했다.

 12월 16일, 국민의 직접선거로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상 28%, 김대중 27%, 김종필 8% 를 제치고 노태우 후보가 36.6%로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참고도서] 지식 e 시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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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부가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 5·18과 4·19혁명, 6월 항쟁 내용을 송두리째 삭제하기로 했다고 발표를 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국사편찬위원장이라는 사람은 '위키피디아'를 근거로해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꿨다고 하며 시끄러운 위원장 자리를 괜히 맡았다며 투덜대더랍니다. (경향신문 사설 참고)

역사는 나라의 주류의 큰 흐름이면서 그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의 사관(史觀)에 의해 1차 필터링이 된 자료입니다. 근대 이전의 한국의 역사는 식민시절 일본에 의해서 씌여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역사가 어떻게 씌여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종종 텔레비젼 토론장에서 편협한 역사관의 교수를 목도할 때면 그에게 배우고 있는 청년들 생각에 울화가 섞인 쓴웃음이 절로 일어납니다. 더구나 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교과서로 공부하게 될 더 어린 꿈나무들을 생각하면 그저 나와는 관련없는 이야기로 치부하기 힘든 뉴스입니다. 어쩌면 일본이 그들의 만행을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목적과 무엇이 다를까 싶습니다. 한국의 시민 혁명도 단지 그들에겐 감추고 싶은 사건일 거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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